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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훈을 세운 시조 태사공의 현손이신 문숙공 관(瓘)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옛 국토를 수복하여 국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 하신 분으로 한 문중을 빛낸 것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위를 드높인 분이시다. 그 위대하신 고려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수태보 문하시중을 안장한 묘소와 사당과 교자총이 있는 이 곳 분수재는 우리 씨족의 성역일
뿐 아니라 국가의 호국유적지라 할 수 있다.
분수재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에 자리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산소는 중국 송(宋)나라 상서(尙書) 석구룡(石球龍)이 난리를 피해 고려에 와서 문숙공의 사저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문숙공의 호의에 보답하는 뜻으로 분수리의 지금 산소 자리를 가리키면서 이곳이 천하 명당으로 장군께서 영생하실 정토라고 일러 주었다.
문숙공이 돌아가시자 이곳에 장례를 모시려 광을 파는데 크고 넓적한 돌이 나왔다.
그 돌을 깰 수가 없어서 그냥 그 돌 위에 모시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상제들의 주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을 깨고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주의 요구대로 돌을 깨는 마지막 순간에 뿌연 연기 같은 김 이 솟아올랐다 한다. 이때가 고려 예종 6년(1111)의 일이다. 문숙공의 여섯째 아들이신 문강공 언이(彦頭)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석구룡 상서를 만나 친 상당한 일을 전하였다. 석구룡은 천광 할 때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묻고, 고려를 떠날 때 석반을 제거했거나 제거하라고 일러주어야 하는데 미처 일러주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석구룡은 앞으로 윤씨 가문은 대대로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만장(輓章)한 폭을 써 주었다.
문숙공의 묘소는 고려 예종 6년(1111)에 예장한 것인데 이조 연산군 당시에 파주 백성을 강제 이주 시키고 왕의 사냥터로 삼았으며 또 병화가 잦았던 탓으로 수호가 소홀한 데다가 당시 종가(宗家)가 미약한 틈을 타서 일시 세도만 믿고 심 아무개가 몰래 투장하여 실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도를 부리던 청송심씨 문중에서는 파평윤씨 문중이 문숙공 묘소를 관리 하지 않아 고총이 된 것을 기화로 문숙공의 묘 뒤에 효종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과 그의 선조 묘를 투장하였다. 또 문숙공 묘소의 곡장을 헐고 묘비를 파괴하여 묻어 버렸다. 심씨 문중은 투장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 산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고 그 산 위에 청송심씨세장지지(靑松沈氏世葬之地)라는 비석까지 세웠으므로 파평윤씨
들도 모르고 지내왔다.
영조 23년(1747)에 후손 동규(東奎)가 그 아들 광로(光魯)와 함께 장탄 땅에 가는 길에 분수원을 지나게 되었다.
심지원 정승의 산소를 구경하러 산에 올라가 보니 심정승의 큰 무덤의 좌측 청룡(靑龍)에 새로 사초를 한 위 아래 묘가 있는데, 위의 묘에는 ‘선략장군이공호문지묘(宣略將軍李公好文之墓)라 새긴 비석이 있고 아래 묘에는 ‘집의 덕수이모묘(執義德水李某墓)’라 새긴 비석이 있는데 모두 짧고 오래된 것이었다. 또 심정승 묘 아래에는 큰 고총이 있었으나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다. 그 후 영조 39년(1763)에 동규가
장단 가는 길에 다시 산위에 올라가 보니 심정승의 묘 아래에 있던 큰 고총이 깎여져 봉분이 작아진 데다가 전에 없던 비석이 서 있는데 살펴보니 심정승 묘 좌청룡에 있던 이호문의 묘비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마을에 내려가 묘주인이 누구인가 물어보니 이형진이라 하므로 그를 찾아가 자세히 내력을 물어보았다.
이형진이 말하기를 그 묘는 자기네 산소가 아니고 심씨 문중에서 자기네 선외가 산소라 하면서 무후가 되어 자기들이 외손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토지를 줄 터이니 다른 사람 에게는 당신 선조묘라 하고 제사를 지내달라기에 심정승 묘의 좌청룡에 있던 이호문의 비석을 옮겨 세웠노라고 사실을 밝혔다. 동규가 생각하기를 문숙공의 산소가 임강현 용봉산 숭복사 동쪽이라 했는데 혹시 이곳이 잃어버린 문숙공의 묘가
아닐까 하여 상경하여 일가들과 이사실을 상의하였다.
일가들이 우선 이호문의 손자 이형진을 심문하니 심정승 묘 좌청룡에 있던 윗묘 는 가짜 무덤이고 아래 무덤은 심씨네 묘를 위장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이호문 묘를 가짜로 만들어 놓았다가 심정승 묘 아래로 이장한 것처럼 꾸며 문숙공 묘소를 흔적도 없이 없애려는 간계임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묘 아래 길 옆에 있는 토분을 파헤쳐 그것이 종중 문헌에 전해오는 교자총(橋子紫 : 여진정벌 당시에 임금께서 문숙공 에게 하사하였던 수레)에 틀림 없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입증되어 종중에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좌윤 면교공(左尹 趙敎公)이 선두에 나서서영조 대왕 앞에 상소하였고,좌상 동도공(左相 東度公)이 국왕에게 직접 상주하였다. 영조 임금은 이 사건을 경기 감사에 처리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비석과 지석이 없는 관계로 다만 이호문의 낡은 비석만을 제거시키고 심씨와 윤씨 두 문중에서 그대로 수호하라는 판정을 내릴 뿐이었다.
파평 윤씨 문중에서는 그대로 순종할 수가 없어서 다시 현장을 조사하였다. 인근 고을의 한 노인이 고총 좌편의 도랑에 묘비를 깨뜨려 묻었다고 일러 주므로 그곳을 파헤쳐 보니 과연 문숙공의 깨진 묘비 조각을 발견하였다. 문숙공의 묘소임을 확신하고 좌상 동도공좌상 께서 다시 영조 임금에게 문숙공의 분묘를 다시 축조하고 문숙공의 묘소도 심호(辱護)하도록 하는 어명을 앙청하였다. 영조 대왕은 그 상주(上奏)에
접하여,“천도(天道)가 소소(昭昭)하여 후손들의 성의가 지극하여 천년고비(千年古碑)를 찾았으니 주군(州軍)을 동원하여 문숙공의 묘를 종전대로 봉축할 것 이며 심지원도 정승을 지낸 왕실의 외가 이니 동산소(同山所)하라.”는 비답(批答)을 내리셨다.
영조 40년(1764)에 주군(州軍)이 동원되어 심지원의 무덤 앞을 깎아 문숙공의 분묘를 크게 수축하였다. 영조 대왕은 도승지 윤동섬을 예관(禮官)으로 보내어 문숙공 묘에 치제(致祭)케 하였다. 이렇게 되니 심씨 문중의 세 무덤은 남게 되고 문숙공의 아드님 문강공의 묘소는 영영 찾지 못하게 되었다.
문숙공의 묘소를 찾는 과정에서 두 문중 사이에 는 상소가 수없이 잇달았다.
어전에서 조사를 받을때 심씨 문중의 대표인 심정최로 부터 문숙공의 비석을 파묻은 것과 이호문의 묘비를 옮겨 세운 사실을 자백 받았다. 심정최는 투장한 죄목으로 처벌 받았다. 이 과정에서 파평윤씨 24세 남원파인 도사공 희복(都事公 照復)은 영조 대왕에게 “대왕은 문숙공의 외손이 아니십니까?” 하고 대들었다 하여 곤장을 맞으셨는데 끝내 장독(杖毒)으로 돌아가셨다.
심묘 당시에 종중의 성금으로 기와집 9칸,초가 8칸의 묘사(墓舍)를 짓고 위토답 29두락과 밭 5일경을 매입하였다.그 후 순종 5년(1805) 유사 각(有司 穀)의 주관 아래 제청(祭廳) 으로 기와집 14칸을 신축하여 이를 분수재(汾水齋)라 하였다. 철종 3년(1852)에 묘소의 사초를 다시 할 때 토산종인(鬼山宗人) 승원(承源)씨가 위토전 일일반경을 헌납하였다.
철종 7년(1856)에 영풍군찬(鈴豊君纘)의 주관으로 제청과 묘사에 대한 대규모 보수공사를 하였다.
문숙공의 묘소는 1972년에 지방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파주 군수가 관리 책임자로 되어 있다.
그 후 1987년에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3대 성민(誠敏)회장의 주관으로 국가사적인 문숙공 묘역 현창사업(顯彭事業)을 관계기관의 협의와 문중 성금으로 1991년 4월에 기공하여 1992년에 제1차 정화사업이 준공되어 우리 백만 윤문의 후손들의 영원히 자랑스러운 역사로 간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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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훈을 세운 시조 태사공의 현손이신 문숙공 관(瓘)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옛 국토를 수복하여 국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 하신 분으로 한 문중을 빛낸 것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위를 드높인 분이시다. 그 위대하신 고려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수태보 문하시중을 안장한 묘소와 사당과 교자총이 있는 이 곳 분수재는 우리 씨족의 성역일
뿐 아니라 국가의 호국유적지라 할 수 있다.
분수재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에 자리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산소는 중국 송(宋)나라 상서(尙書) 석구룡(石球龍)이 난리를 피해 고려에 와서 문숙공의 사저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문숙공의 호의에 보답하는 뜻으로 분수리의 지금 산소 자리를 가리키면서 이곳이 천하 명당으로 장군께서 영생하실 정토라고 일러 주었다.
문숙공이 돌아가시자 이곳에 장례를 모시려 광을 파는데 크고 넓적한 돌이 나왔다.
그 돌을 깰 수가 없어서 그냥 그 돌 위에 모시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상제들의 주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을 깨고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주의 요구대로 돌을 깨는 마지막 순간에 뿌연 연기 같은 김 이 솟아올랐다 한다. 이때가 고려 예종 6년(1111)의 일이다. 문숙공의 여섯째 아들이신 문강공 언이(彦頭)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석구룡 상서를 만나 친 상당한 일을 전하였다. 석구룡은 천광 할 때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묻고, 고려를 떠날 때 석반을 제거했거나 제거하라고 일러주어야 하는데 미처 일러주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석구룡은 앞으로 윤씨 가문은 대대로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만장(輓章)한 폭을 써 주었다.
문숙공의 묘소는 고려 예종 6년(1111)에 예장한 것인데 이조 연산군 당시에 파주 백성을 강제 이주 시키고 왕의 사냥터로 삼았으며 또 병화가 잦았던 탓으로 수호가 소홀한 데다가 당시 종가(宗家)가 미약한 틈을 타서 일시 세도만 믿고 심 아무개가 몰래 투장하여 실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도를 부리던 청송심씨 문중에서는 파평윤씨 문중이 문숙공 묘소를 관리 하지 않아 고총이 된 것을 기화로 문숙공의 묘 뒤에 효종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과 그의 선조 묘를 투장하였다. 또 문숙공 묘소의 곡장을 헐고 묘비를 파괴하여 묻어 버렸다. 심씨 문중은 투장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 산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고 그 산 위에 청송심씨세장지지(靑松沈氏世葬之地)라는 비석까지 세웠으므로 파평윤씨
들도 모르고 지내왔다.
영조 23년(1747)에 후손 동규(東奎)가 그 아들 광로(光魯)와 함께 장탄 땅에 가는 길에 분수원을 지나게 되었다.
심지원 정승의 산소를 구경하러 산에 올라가 보니 심정승의 큰 무덤의 좌측 청룡(靑龍)에 새로 사초를 한 위 아래 묘가 있는데, 위의 묘에는 ‘선략장군이공호문지묘(宣略將軍李公好文之墓)라 새긴 비석이 있고 아래 묘에는 ‘집의 덕수이모묘(執義德水李某墓)’라 새긴 비석이 있는데 모두 짧고 오래된 것이었다. 또 심정승 묘 아래에는 큰 고총이 있었으나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다. 그 후 영조 39년(1763)에 동규가
장단 가는 길에 다시 산위에 올라가 보니 심정승의 묘 아래에 있던 큰 고총이 깎여져 봉분이 작아진 데다가 전에 없던 비석이 서 있는데 살펴보니 심정승 묘 좌청룡에 있던 이호문의 묘비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마을에 내려가 묘주인이 누구인가 물어보니 이형진이라 하므로 그를 찾아가 자세히 내력을 물어보았다.
이형진이 말하기를 그 묘는 자기네 산소가 아니고 심씨 문중에서 자기네 선외가 산소라 하면서 무후가 되어 자기들이 외손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토지를 줄 터이니 다른 사람 에게는 당신 선조묘라 하고 제사를 지내달라기에 심정승 묘의 좌청룡에 있던 이호문의 비석을 옮겨 세웠노라고 사실을 밝혔다. 동규가 생각하기를 문숙공의 산소가 임강현 용봉산 숭복사 동쪽이라 했는데 혹시 이곳이 잃어버린 문숙공의 묘가
아닐까 하여 상경하여 일가들과 이사실을 상의하였다.
일가들이 우선 이호문의 손자 이형진을 심문하니 심정승 묘 좌청룡에 있던 윗묘 는 가짜 무덤이고 아래 무덤은 심씨네 묘를 위장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이호문 묘를 가짜로 만들어 놓았다가 심정승 묘 아래로 이장한 것처럼 꾸며 문숙공 묘소를 흔적도 없이 없애려는 간계임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묘 아래 길 옆에 있는 토분을 파헤쳐 그것이 종중 문헌에 전해오는 교자총(橋子紫 : 여진정벌 당시에 임금께서 문숙공 에게 하사하였던 수레)에 틀림 없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입증되어 종중에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좌윤 면교공(左尹 趙敎公)이 선두에 나서서영조 대왕 앞에 상소하였고,좌상 동도공(左相 東度公)이 국왕에게 직접 상주하였다. 영조 임금은 이 사건을 경기 감사에 처리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비석과 지석이 없는 관계로 다만 이호문의 낡은 비석만을 제거시키고 심씨와 윤씨 두 문중에서 그대로 수호하라는 판정을 내릴 뿐이었다.
파평 윤씨 문중에서는 그대로 순종할 수가 없어서 다시 현장을 조사하였다. 인근 고을의 한 노인이 고총 좌편의 도랑에 묘비를 깨뜨려 묻었다고 일러 주므로 그곳을 파헤쳐 보니 과연 문숙공의 깨진 묘비 조각을 발견하였다. 문숙공의 묘소임을 확신하고 좌상 동도공좌상 께서 다시 영조 임금에게 문숙공의 분묘를 다시 축조하고 문숙공의 묘소도 심호(辱護)하도록 하는 어명을 앙청하였다. 영조 대왕은 그 상주(上奏)에
접하여,“천도(天道)가 소소(昭昭)하여 후손들의 성의가 지극하여 천년고비(千年古碑)를 찾았으니 주군(州軍)을 동원하여 문숙공의 묘를 종전대로 봉축할 것 이며 심지원도 정승을 지낸 왕실의 외가 이니 동산소(同山所)하라.”는 비답(批答)을 내리셨다.
영조 40년(1764)에 주군(州軍)이 동원되어 심지원의 무덤 앞을 깎아 문숙공의 분묘를 크게 수축하였다. 영조 대왕은 도승지 윤동섬을 예관(禮官)으로 보내어 문숙공 묘에 치제(致祭)케 하였다. 이렇게 되니 심씨 문중의 세 무덤은 남게 되고 문숙공의 아드님 문강공의 묘소는 영영 찾지 못하게 되었다.
문숙공의 묘소를 찾는 과정에서 두 문중 사이에 는 상소가 수없이 잇달았다.
어전에서 조사를 받을때 심씨 문중의 대표인 심정최로 부터 문숙공의 비석을 파묻은 것과 이호문의 묘비를 옮겨 세운 사실을 자백 받았다. 심정최는 투장한 죄목으로 처벌 받았다. 이 과정에서 파평윤씨 24세 남원파인 도사공 희복(都事公 照復)은 영조 대왕에게 “대왕은 문숙공의 외손이 아니십니까?” 하고 대들었다 하여 곤장을 맞으셨는데 끝내 장독(杖毒)으로 돌아가셨다.
심묘 당시에 종중의 성금으로 기와집 9칸,초가 8칸의 묘사(墓舍)를 짓고 위토답 29두락과 밭 5일경을 매입하였다.그 후 순종 5년(1805) 유사 각(有司 穀)의 주관 아래 제청(祭廳) 으로 기와집 14칸을 신축하여 이를 분수재(汾水齋)라 하였다. 철종 3년(1852)에 묘소의 사초를 다시 할 때 토산종인(鬼山宗人) 승원(承源)씨가 위토전 일일반경을 헌납하였다.
철종 7년(1856)에 영풍군찬(鈴豊君纘)의 주관으로 제청과 묘사에 대한 대규모 보수공사를 하였다.
문숙공의 묘소는 1972년에 지방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파주 군수가 관리 책임자로 되어 있다.
그 후 1987년에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3대 성민(誠敏)회장의 주관으로 국가사적인 문숙공 묘역 현창사업(顯彭事業)을 관계기관의 협의와 문중 성금으로 1991년 4월에 기공하여 1992년에 제1차 정화사업이 준공되어 우리 백만 윤문의 후손들의 영원히 자랑스러운 역사로 간직하게 되었다.